박명진 시몬 서울대교구 연령회 연합회 상장례 강사
1. 염습과 입관의 시편들
시편 제113(114)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신앙 안에서 생생하게 재현하는 노래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운 삶이 이어지던 이승을 지나 완전히 구원되는 천상 세계로 넘어가는 장례에 잘 부합합니다.
시편 제113후(115)편 5-7절의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라는 이를 두고 “사람으로서 장애란 장애는 모두 다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에,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가 바로 죽은 사람이다.”라고 가르치는 이가 있지만, “그들의 우상들은 금이며 은, 사람 손으로 지어낸 것이니이다”(4절)에서 보듯이 이 시편에서 언급하는 이는 시신이 아니라 우상(偶像)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우상숭배에 빠졌지만, 우상은 그 어떤 고통도 덜어주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이 세상 나그넷길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인데도 사랑하는 이와 이별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고 우상숭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믿고 맡기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2. 출관의 시편들
시편 제41(42)편과 제42(43)편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고난에서 하느님을 간절히 찾으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지난날에는 늘 앞장서서 하느님의 집으로 갔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없어 가슴이 녹아날 만큼 아픕니다. 그러나 이렇게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밖에 없는 하나뿐인 존재임을 되살려내고, 주님께서 계신 그곳으로 자기를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하게 청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 빠지더라도 하느님만 굳게 믿고 바란다면 다시 그분을 찬미할 수 있고 온갖 고통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편 제22(23)편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수많은 민족이 즐겨 부르던 노래입니다. 하느님은 한시도 우리를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으시니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극복할 수 있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든든하게 지켜주시니 이 세상 순례를 마칠 때도 새로운 풀밭과 물을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주님을 향해 기쁘게 갈 수 있습니다.
시편 제83(84)편은 성전을 애타게 그리워하지만, 실제로 그리워하는 것은 거기에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분을 체험했기 때문에 참 평화를 발견하고, 넘쳐나는 즐거움에 벅찬 감격을 누릴 수 있던 성전이 그립지만, 지금은 애태우며 지쳐갈 뿐입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을 맞을수록 우리가 찾아가 머물 곳은 주님의 집뿐입니다.
출관은 하느님의 품으로 영원히 돌아가기 위해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삶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는 슬프고 아쉬운 순간이지만, 이러한 고통은 찰나(刹那)에 불과할 뿐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바로 앞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는 이에게도,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는 유족에게도 참된 희망과 위로를 주는 노래입니다.
3. 고별식
장례미사에 대한 해설은 지면 관계로 생략합니다. 1968년까지 장례미사를 봉헌하고 운구하기 전에 시신 앞이나 무덤 앞에서 죽은 이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청하는 사도예절을 거행했으나, 1969년부터 죽은 이와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나 영원한 삶을 누릴 때까지 나누는 인사라는 의미의 고별식을 거행합니다.
성당 밖으로 운구하며 부르는 ‘하늘의 성인들이여’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실패나 패배가 아니라, 죄와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진정한 승리이므로 우렁차고 기쁘게 불러야 합니다. “천사들은 이 교우를…” 역시 죽은 이를 하늘나라로 천사들이 이끌고, 순교자들이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는 희망의 찬가입니다.
4. 운구의 시편들
시편 제117(118)편은 주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니 아무도 해치지 못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노래합니다. 일상에서 겪는 사람이나 사물을 인간적인 기준에서 하찮게 여길 때마다 주님은 그들도 당신의 존귀한 피조물이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묘지를 향해 떠나는 길이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워 피하고만 싶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삶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새 출발이므로 주님께 감사하며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해야 합니다.
시편 제92(93)편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는 위대함을 강조하면서 그분께는 영광이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백성에게는 위로가 된다는 노래입니다.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그분의 은총이 넘치는 나라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굳세고 튼튼합니다. 하느님의 법은 실로 참되므로 그분의 집은 거룩함이 어울리고 영원할 것인데, 그런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우리가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그저 우리는 그분의 높은 권능과 위엄을 찬미하며 그분께 나아갈 뿐입니다.
시편 제24(25)편은 하느님께 자기의 간절한 바람이 헛되지 않도록, 원수들이 자기의 불행을 기뻐하지 않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간구합니다. 자애롭고 의로우신 주님은 죄인에게 길을 가르치고, 겸손한 이에게 의를 따라 걷게 하며, 당신의 언약과 계명을 지키는 이에게 사랑과 진리이시므로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자비로써 계속 보살펴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이런 간청과 호소는 신심 생활이 철저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변치 않는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잘 알고 있으므로 자기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처럼 주님만 바라보고 믿는 사람은 아무리 죄가 클지라도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자손에게까지 축복하실 것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5. 즈카르야의 노래
묘역에 도착하면 ‘상장예식’ 254~281쪽을 따라 무덤을 축복한 뒤에 시신을 안장하고 분향하며 성수를 뿌립니다. 성경 봉독과 청원 기도, 유가족을 위한 기도와 회중의 응답, 마침 기도 등을 바친 뒤에 흙을 덮으며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르고 장례의 모든 과정을 마무리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 68-79)는 나이가 많아 잉태하지 못하던 엘리사벳이 주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낳자,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소식을 전할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기뻐하며 즈카르야가 부른 것입니다. 하관 예식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돌아갈 때까지 은총을 베푸신다는 믿음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 주님은 다시 오시고, 그분의 자비와 은총으로 모든 이가 부활할 것이므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악의 올가미를 벗어나 주님만 믿고 섬기도록 이끄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절망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기대와 희망이 시작되는 찬미가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10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