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개신교 사람들은 자기네 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으면 모두 지옥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순신장군도 지옥 가는지 궁금합니다. 더러는 우리 천주교도 이단이라고 하고 천주교신자들도 모두 지옥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마더 데레사수녀님도 지옥 가는지 궁금합니다... 20세기 개신교의 가장 큰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는 모차르트 음악을 너무나 좋아하였던 그는 죽기 전에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에 반드시 지옥에 갔을 것이고... 모차르트가 없는 천당에 가면 심심해서 어쩌나... 하고요...
가톨릭신자들은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 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 이웃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천주교와 개신교가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천주교와 개신교가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가운데서도 교파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포용력이 넓은 교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보수적인 교파들은 자기네들과 신앙이 같은 사람들만 사랑하는 폐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과 신앙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이 아니라 사탄으로 보고 배척하고 저주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의미는... 천주교든, 개신교든, 불교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중국인이든... 어느 누구라도 최종적 의미에서 적이나 원수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대국적인 마음이 필요하다하겠습니다.
1. 성서와 교부시대(150-500)
신약성서에는 구원을 위해 반드시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연결된 신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신학자들은 가톨릭교회 안에 있어야 구원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학자 오리게네스(253년 또는 254년 사망)와 치쁘리아노(258년 사망)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사상이 개진되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누가 교회 밖으로 나가면, 그는 자기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계속 발전되었는데, 신학자 풀겐시우스(468-533)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음의 사실은 의심 없이 가장 명백하다. 모든 이방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 모든 열교인과 이교인들, 즉 가톨릭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악마와 그 졸도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속에 떨어질 것이다.”
2. 중세(500-1500)의 확립
중세에 와서 이 사상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마침내 플로렌스공의회(1439-1445)는 풀겐시우스의 표현을 빌어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이나 열교인, 이교인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악마와 그 졸도들을 위해 준비한 영원한 불속에 떨어질 것이다. 오직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만 교회의 성사가 구원이 된다. 누가 아무리 많은 선행과 자선을 하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피를 흘렸다 하더라도, 그가 가톨릭교회와의 일치 속에 그 품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구원될 수 없다.” ‘가톨릭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교부시대에 발전되어 중세에 확립된 이 엄격주의는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근대로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비정한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3. 근대의 변화
이 엄격주의는 역사 안에서 조금씩 변화되었습니다.
첫째, 1400년대 말부터 유럽은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와의 만남으로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유럽만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가톨릭만이 유일한 종교로 생각했던 유럽사람들은 특히 인도나 중국과 같은 나라의 고도로 발달된 문화와 종교를 만나면서 동아시아 사람들 모두가 멸망된다는 생각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둘째, 1500년대 유럽의 교회분열은 가톨릭교회의 승리주의와 자만심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경험도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정식을 심사숙고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1883년, 교황 비오9세는 회칙에서 “참된 그리스도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은 희망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불가피한 무지로 참된 그리스도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 부여한 자연적인 법과 계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1943년, 교황 비오12세도 “교회에 명시적으로 속하지는 않지만 신앙과 사랑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삶의 열망을 통해 구세주의 신비로운 몸에 이를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4. 신학적 반성
칼 라너(1904-1984)와 이브 콩가르(1904-1996)를 비롯한 현대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하는 한편, 제2차 바티칸공의회신학자로 활동하면서 바티칸공의회정신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습니다. 특히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사상’은 이 어려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누가 하느님 보편적 계시의 숨은 부르심을 받아들여 양심에 따라 선의를 추구한다면, 그는 이미 신앙과 희망과 사랑 안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며,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내포하고 있는 명시적이지 않은 신앙은 그리스도교회와의 만남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되고 심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라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몸으로만 교회에 머물러 있고 마음은 교회를 떠나 사는 사람들보다 구원에 훨씬 더 가깝다고 확신하였습니다.
5.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
마침내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플로렌스공의회의 결정을 바꾸고 있습니다. 먼저 선교교령은 간접적으로 구원의 보편성을 선언 합니다: “본인의 탓없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록 하느님은 당신만이 아시는 길로 신앙에로 이끄실 수 있으시긴 하지만, 교회는 복음을 전파할 필요성과 성스러운 의무를 아울러 갖는 것이며, 이로 인해 선교활동은 항상 변함없이 오늘도 그 힘과 완전한 필요성을 갖고 있다.”(교령7항) 교회헌장은 본격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보편적 구원가능성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비자들의 구원가능성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예비자들은 교회에 결합되려는 소망 자체로써 교회와 결합된다.’(헌장14항) 다음으로 정교회나 개신교의 구원가능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은 완전한 신앙, 성사, 로마교황과의 일치라는 세요소를 다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그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와 결합되어 있다.’(헌장15항) 다음으로 불교나 그 밖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구원가능성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 유일신을 신앙하는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헌장 16항) 마지막으로 아무런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구원가능성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양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헌장16항) 천주교신자가 아니더라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을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하게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정도'입니다. 가톨릭 이외의 다른 모든 길은 '구원의 예외적인 길'입니다. 구원의 정도인 가톨릭교회의 '참된 신앙'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대구대교구 전광진 엘마노 신부님